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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학

부활하자! 다이너마이트 타선

by 휴버트 2022. 11. 2.

1981년 7월 23일. 한국화약그룹을 창업하고 이끌던 김종희 회장이 59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그는 학창시절 한국인 학생을 괴롭혔던 일본인 학생을 구타한 역사가 있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의리를 중요시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리의 성격을 가진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그가 세운 한화그룸의 기업 경영 철학에도 '신용과 의리'가 강조되고 있으며 한화 사가의 첫 소절이 그 증거다. '미스터 다이너마이트'라 불린 한국의 화약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1975년 천안에 북일고를 설립하고 야구부를 창설해 3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며 충청야구의 이름을 전국무대에 올려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야구를 사랑했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난 그는, 한국프로야구사의 행간에서만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의 하나다. 그는 1970년대 초반 미국 방문길에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경기에 시구자로 나서 장내 아나운서를 통해 '한국의 미스터 다이너마이트'라고 소개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다저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수만 관중의 열렬한 환대를 받은 것을 계기로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다이너마이트 못지않은 열기가 야구장에서 폭발하는 모습, 더구나 살기와 탄가루와 고단한 땀 냄새가 아닌 환호와 즐거움의 연료가 되는 모습을 그라운드 한가운데서 경험하며 매료되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귀국 후 김회장은 천안북일고 야구부를 만들어 충청권 야구붐을 일으켰고, 중기 계획으로 실업야구단 설립을 구상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선수들이 돈 걱정없이 야구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재단이 제공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북일고는 김회장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빠르게 성장했고, 창단 3년 만인 1980년 봉황기 전국 고교 야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는 바로 충청권 야구 붐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동시에 야구 인기의 전국화에 마침표를 찍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1977년 11월 어느 날 밤 전북 이리역에 정차한 채 밤을 나던 폭약 운송 열차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서 김회장과 한국화약의 행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폭약 같은 위험물을 실은 화물열차는 역내에 머물게 하지 않고 즉시 통과시켜야 한다는 관리규정을 무시한 이리역의 과실과, 그런 조치에 불만을 품고 술을마신 뒤 화차 안에서 촛불을 켠 채 잠을 청한 한국화학 운송직원의 실수가 겹치며 역 반경 500미터 이내의 건물들이 대부분 무너지고, 이 사고로 인해 사망자 59명을 포함해 모두 1,4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낸 건국 이래 최대 민간 사고로 기록하게 되었다. 그 사고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김회장은 회사 경영권을 제외한 전 재산에 가까운 90억 원의 사재를 털었고, 게다가 지병인 당뇨의 합병증으로 신장병이 발병하고 악화되어 매일 혈액투석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쌓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경영 일선에서 뛰어야 했던 상황은 결국 그렇게, 김회장은 너무 빠르고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어졌다. 1981년 7월 27일, 김회장은 성공회 대성당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충남 공주시의 선영에서 영면했는데, 그날 김 회장의 운구를 맡았던 것은 북일고의 전, 현직 감독이던 김영덕과 이희수, 그리고 졸업생 이상군을 비롯한 고인이 사랑하던 야구선수들이었다. 김회장이 화약과 화약을 만드는 이들을 경계하며 남긴 말이 있다. '"화약은 진실하다. 반드시 폭발하기 때문이다. 화약은 정직한 장소에서 정직한 시간에 폭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화약을 만드는 사람은 모두 화약처럼 진실하고 정직해야만 한다." 비유하자면 알프레드 노벨이 학문 발전과 평화 증진을 위한 상을 제정함으로써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다이너마이트가 죽음이 아닌 삶의 도구로 자리 잡게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한국의 미스터 다이너마이트 김회장은 야구를 통해 폭약이 가진 진실함, 정직함의 본질을 살려 '파괴가 아닌 건설의 상징'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김회장은 해방 직후 미군정에 의해 일본의 화약 공급회사 화약공판의 지배인으로 지정되어 일본 정부가 남기고 간 화약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얼마 뒤 전쟁이 터지고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자신의 몸만 빼내서 피난을 가는 대신 서울의 자택에 자신에게 맡겨진 화약 상자들을 모두 숨겨두었다가 서울이 수복된 뒤 그대로 국군에 반납하는 배짱과 헌신성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휴전 이후 화약공판을 인수해 한국화약을 설립한 그는 폭약과 다이너마이트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기업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제약, 건설, 무역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빠르게 성장해 굴지의 대기업을 이룰 수 있었다. 전쟁이 촉발시킨 남북한의 군비 경쟁 속에서 빠르게 군사력을 강화해야 했던 국방부,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 밤낮 없이 발파작업이 이루어 져야 했던 전국의 탄광에서 화약과 폭약에 대한 수요가 그야말로 폭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야구는 화약과 닮은 면이 있다. 야구장에서의 에너지 역시 진실하고 정직한 땀을 통해서만 발화시킬 수 있고, 폭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야구팀을 사랑한다는 것은 맹목적이고 운명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비록 한 순간이나마 진실하고 정직하게 폭발하는 아름다운 불꽃을 목격하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빠져들 수 없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