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신인 이정훈이 22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내 해태 이순철과 OB 김광림의 21경기 기록을 넘어서는 신기록을 넘어서는 신기록을 작성했다. 이정훈은 대구상고 출신으로 타격 재능과 근성을 겸비한 유망주였지만 그해부터 1차 지명권이 3장으로 줄어든 탓에 고향팀 삼성의 유니폼을 입지 못하고 2차 지명 대상으로 나와 있었다. 하필 그해 국가대표팀에서 키스톤 콤비로 나서던 류중일과 강기웅, 그리고 마운드 보강이 절실했던 삼성에 꼭 필요했던 투수 장태수가 대구에서 배출됐기 때문이다. 이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악바리' 이정훈은 대구상고와 동아대학교를 졸업했다. 류중일-강기웅-장태수에 밀려 연고팀 삼성의 1차 지명을 받지 못했고, 1987년 2차 지명 1순위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 22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우고. 335의 높은 타율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입단 초기부터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 그리고 근성 있는 플레이 스타일로 '악바리'란 별명을 얻으며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90년대 들어서는 장타력까지 겸비하게 되면서 완성된 모습을 보였다. 1991년과 1992년에는 2년 연속 타격왕에 올랐고, 20개 안팎의 홈런까지 곁들였다. 특히 1992년에는 .360의 기록적인 고타율에 더해 25홈런 21도루를 기록해 20-20을 완수한 완성형 타자였다. 하지만 의욕이 지나쳐 부상이 잦았고,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성급하게 다시 경기에 나서는 악순환 때문에 1993년부터는 부진이 길어졌다. 1994년 시즌이 끝난 뒤 삼성으로 트레이드됐으며, 1997년에는 OB 베어스로 다시 옮겨 한 시즌을 뛴 다음 은퇴했다. 은퇴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은 후 한화 이글스에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코치로 활동했고, 2005년 시즌 뒤에는 LG 트윈스로 옮겨 코치를 역임했다. 2009년부터는 북일고등학교 감독을 맡아 곧바로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2012년에는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13년부터는 한화 이글스로 복귀해 2군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2차 지명회의에서도 빙그레보다 앞선 순위의 지명권을 가진 청보 핀토스가 있었고, 특히 그 팀의 강태정 감독은 이정훈이 졸업한 대구상고의 '대부'라고까지 불린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강태정 감독이 이정훈을 뽑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궁리 끝에 배성서 감독은 노진호 단장과 짜고 연극을 벌이기로 했다. 일부러 청보 스카우트 팀이 보는 앞에서 '이정훈은 천천히 뽑아도 된다. 당장 투수가 필요한데 무슨 소리냐'며 설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 작전은 그대로 들어 맞아서, 이정훈도 급하지만 당장 투수력 보강도 급했던 청보가 연세대 이상훈과 영남대 최진영, 두 명의 투수를 1라운드에서 지명했고 빙그래는 곧바로 동국대 투수 이동석과 함께 동아대 이정훈을 지명했다. 빙그레가 다른 투수 두 명을 지명하면, 다음 라운드에서 이정훈을 찍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다가 허를 찔린 청보 쪽에서 비명이, 작전을 성공시킨 빙그레 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 것은 물론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빙그레 유니폼을 입게 된 이정훈은 첫 시즌부터 전 경기에 출전해 124개의 안타를 때려 최다 안타왕에 오르는 등 .335의 높은 타율과 폭넓은 중견수 수비로 공수의 핵이 됐다. 고향팀에서 '군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오라'며 문전박대를 받은 이강돈은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해 모진 훈련을 버텨내며 '6.3동지회'의 기둥이 됐고, 훗날 두 차례나 최다 안타왕에 등극하며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주역이 됐다. 인연이 묘한 것은, 이강돈에게 '군대 문제부터 해결하고 오라'고 등을 떠민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이 바로 나중에 빙그레 이글스에서 이강돈과 함께 전성기를 이끈 김영덕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그해 빙그레 이글스는 청보 핀토스를 7경기 차로 멀찍이 따돌리며 6위를 마크해 한 해 전보다 조금이나마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역시 각각 18승과 13승을 올리며 더욱 발전한 이상군과 한희민이 마운드를 이끌었고, 팀 최초의 신인왕 이정훈과 역시 팀 최초의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버 유승안이 타선을 이끌어준 결과였다. 1987년 4월 14일, 해태와의 대전 홈경기에 주전 2루수 이광길이 손톱이 갈라지는 부상을 당해 결장하자 유격수 김성갑을 2루로 보내야 했고, 유격수 자리에 어쩔 수 없이 기용한 고졸 연습생 출신의 자그마한 소년 장종훈이 데뷔 첫 타석에서 2루타를 때려내고 밀어내기로 끝내기 결승타점까지 만들어내며 대활약했고, 곧장 주전 유격수 자리로 차고 들어갔다. 그해 성적은 .270의 타율에 8홈런. 15개의 2루타. "장종훈이가 세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희 팀에 연습생으로 들어왔을 때는 굉장히 말랐었어요. 키가 178? 그 정도였는데 들어와서는 방망이 풀스윙이 안 됐었어요. 알루미늄 들다가 왔으니까. 기초도 덜 다져지고. 나무방망이가 알루미늄보다 무겁잖아요. 그래서 풀스윙이 안됐어요. 178 정도의 신장을 가지고 막 70킬로 정도밖에 안 나갔을 거야. 그렇게 호리호리했었어요. 그래서 와서 혹독한 연습을 하고, 그리고 살이 붙고, 경험도 붙고, 이러면서 지금의 장종훈이가 된 거죠." - 이강돈- 그렇게 빙그레 이글스는 창단후 3년째를 보냈다. 리그 참가 2번째 시즌에 꼴찌를 탈출했고, 신인왕과 최다 안타왕, 골든글러버 등의 타이틀홀더들도 배출했으며, 연속 경기 안타와 사이클링히트 같은 진기록들도 만들어냈다. 아직 큰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돌아보면 불가능할 것 같던 일들을 이루어놓은 셈이었다. 하지만 보장된 3년의 임기 동안 신생팀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져놓은 배성서 감독에게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창단할 때부터, 아니 창단을 구체적으로 구상하기 전부터 그 팀의 감독으로 내정되어 있다시피 했던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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