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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학

신생팀 이글스의 투혼

by 휴버트 2022. 11. 6.

1986년 4월 대전 한밭야구장에는 1만 3천여 명이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도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1만여명 가까운 관객이 야구장 앞에서 서성대다가 발걸음을 돌리는 대성황이 연출됐다. 임시 연고구단 OB 베어스가 떠난 지 2년 만에, 이번에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겠다며 새로이 시작하는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가 역사적인 창단 첫 경기를 치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의 상대는 에이서 하기룡을 선발로 내세운 MBC 청룡이었다. 창단  첫 승은 시즌 5번째 경기인 1986년 4월 청보 핀토스 와의 인천 원정경기에서 나왔다. 5대 0의 완벽한 승리였고, 그날의 수훈갑은 첫 경기에서 구원 등판해 인상적인 첫선을 보였던 한희민이었다. 한희민은 그날 구단의 첫 승을 자신의 완봉승으로 장식했고, 이강돈은 8회초에 쐐기 투런 홈런을 날려 자신의 프로데뷔 첫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의 데뷔 후 12타석 만이었다. 개막전 이글스 선발투스는 장명부였다.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해 427.1이닝을 던져 30승을 만들어내며 거의 혼자 힘으로 승률 1할대의 꼴찌팀을 일약 선두싸움을 벌이는 팀으로 끌어올렸던 전설적인 투수였다. 비록 그해의 무리와 여러 가지 사생활 문제, 그리고 의욕 상실증 때문에 다음 시즌부터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나 1983년의 괴물 같은 성적과의 대비효과 때문에 나온 말일 뿐이지 그래도 1984년 1985년 두 시즌에도  250이닝 안팎을 소화하면서 두 자릿수 이상의 승리를 챙긴 대투수 였다. 청보 핀토스에서 버린 카드였던 그를 빙그레 이글스가 영입한 것 역시 그에게 30승을 기록한 1983년의 모습까지 기대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전까지 그가 한국무대에서 기록했던 최악의 성적인 1985년 11승 정도는 언제든지 생산해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감은 어느 누구보다도 충만했었어요. 왜 그러냐면 저도 대표선수 출신이고 나름대로의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사실은. 그래서 사실 타석에 나가든지 수비를 나가든지 자신감은 상당히 있었죠. 어떤 때는 하루에 2게임도 하고 싶었어요. 시합하는게 좋아서. 그런데 제가 개막전부터 시작해서 11타석 무안타였어요. 그러니 저도 진짜 환장하죠. 그렇게 자신감 있었는데 환장하죠. 그래서 배성서 감독님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네가 여기서 안타를 못 치면 너는 내가 감독하는 동안에는 시합을 못 내보낸다. 그런 얘기까지 했었어요. 그래서 12타석 만에 안타를 친게 첫 안타가 그게 홈런이에요. 그때는뭐 공에 사인해서 보관하고, 그런 거 없었어요. 기념이나 그런 걸 만끽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첫 안타 친 것만 해도 감지덕지니까. 그때 당시 청보에 김신부라고 재일교포, 언더핸드로 던지는 투수 있잖아요. 그 친구한테 첫 안타이자 첫 홈런을 뽑았죠." -이강돈-  물론 시즌 전 구단 안팎을 통틀어 만장일치에 가깝던 '꼴찌'라는 전망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전기리그 12승 42패로 6위 청보에 5경기 차 뒤진 7팀 중 7위. 하지만 체력과 정신력이라는 면에서만큼은 밀리지 않을 정도로 준비돼 있던 이글스는 가장 부족했던 경기감각과 경험을 실전을 통해 보충해가며 빠르게 강해졌다. 첫 승 이후에도 술술 풀려나간 것은 아니었다. 4월 16일에 이상군의 2실점 완투승으로 2승째를 올리기까지는 다시 6연패의 늪을 건너야 했고, 6월 부산 원정에서는 재일교포 투수 김정행에게 볼넷 4개만 얻어내며 안타를 뽑지 못해 통산 2호 노히트노런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 유승안이 4월 내내 4할대 타율로 타격 1위를 달리며 공격야구를 이끌었지만 기껏 벌어놓은 점수를 지켜줄 투수가 없었다. 후기리그에는 전기리그에 비해 8번 적게 지고 7번 많이 이긴 19승 1무 34패. 청보 핀토스르 3.5경기 차로 누르며 7위에서 한 단게 올라선 6위였다. 그해를 통틀어 보자면 32승 1무 76패로 다시 7위가 되지만, 그 76번의 패배 중 28번이 1점 차였을 만큼 한 경기 한 경기 치열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참 투수 없었어요. 투수들이 저희 때는 없었습니다. 게임에 투입이 되면 롱으로 갈 수 있는 선수들이 없었어요. 고작 해봐야 둘밖에 없거든. 이상군, 한희민, 나머지는 잠깐 잠깐씩 해야 하는데, 그것도 숫자가 모자라서. 그런 형편이었어요. 그래서 경기 초반에 앞서가다가도 경기 후반에 그렇게 역부족으로 밀리면 짜증나죠. 그래서 시합 끝나면 '투수들 집합해봐라' 하고 선배들이 농담도 하고 그랬지. 근데 뭐 실력이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이강돈- 빙그레 이글스의 투혼이 그만큼의 성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마운드의 두 기둥, 이상군과 한희민의 수훈 덕분이었다. 그들보다 더 큰 기대를 받았던 장명부가 7월 26일 MBC 청룡전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고 '고의 끝내기 보크'를 저지르는 등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모습을 노출하며 시즌 1승 18패로 주저앉은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상군은 자신의 12승을 모두 완투승으로 만들어내는 등 19번이나 완투했고, 한희민 역시 12번 완투하며 9승을 올려주었다. 특히 이상군은 6월 11일부터 29일까지 3경기 연속 무사사구 완봉승을 기록하며 단순한 유망주가 아닌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급 투수로 단숨에 올라서기도 했다. 이상군은 무엇보다도 정교한 제구력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심판들이 이상군을 불러다가 판정 연습을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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