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3월.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창업자의 별세와 갑작스런 경영권 승계 과정을 치르느라 경황이 없던 한국화약그룹이 빠진 채, 연고지로 희망하는 기업이 없었던 충청권은 '3년 후 서울 이전' 약속과 함께 두산그룹 OB베어스에 맡겨졌다. 그리고 그렇게 충청권과 서울 지역 선수 일부로 구성하고, 북일고 우승의 주역 김영덕 감독이 지휘한 대전 연고 구단 OB 베어스가 첫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의 챔피언이 된다. 1984년 10월 충청권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 제7 구단의 조속한 창설을 요청하는 공문을 내무부에 접수했다. OB 베어스와 약속된 3년간의 계약 동거기간이 이미 다 끝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승계주자가 정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한 충청권의 조바심이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1985년 2월에 치려질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충청권에는 '연고 구단을 서울에 빼앗긴 무능한 국회의원'들에 대한 성토 여론이 등장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사실 충청권을 기반으로 새 구단을 당장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구단을 맡을 기업이 한국화약그룹이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거의 공감이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기존 구단들의 '본전 생각'과 '텃세'였다. 나름대로 적지 않은 적자를 감수하고 실패의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개척한 프로야구라는 새 시장에 후발주자를 무임승차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기존 6개 구단주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원년에 두산그룹이 그렇게 피하고 싶어 했을 만큼 충청권 역시 척박한 지역이긴 했다. 북일고의 전국제패 이후 세광고, 대전고, 그리고 충청권 전통의 명문 공주고가 힘을 내기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 봐야 전국무대에 이름이 알려진 선수들은 대부분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을 정도로 얕은 역사였다. 인구도 그 무렵엔 아직 영남은 물론 호남에 비해서도 한참 적었을 뿐 아니라, 사방으로 뚫려 있어 비교적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답게 '충청인' 이라는 독자적인 정체성도 강한 편이 못 됐다. 하지만 막 살아나던 지역민들의 야구 열기는 만만치 않았고, 기왕에 가지고 있던 프로야구단을 잃어버리게 될 경우 그 박탈감은 쉽게 무마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대전 시민들은 OB 베어스와 함께 초대 챔피언 등극의 짜릿한 기쁨을 이미 맛본 뒤였다. 사실 충청권을 기반으로 새 구단을 당장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구단을 맡을 기업이 한국 화약그룹이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거의 공감이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기존 구단들의 '본전 생각'과 '텃세'였다. 나름대로 적지 않은 적자를 감수하고 실패의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개척한 프로야구라는 새 시장에 후발주자를 무임승차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기존 6개 구단주들의 생각이었다. 그해 프로야구가 당초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흥행에 성공하자 10여개의 기업들이 프로야구단 창단 희망 의사를 밝히게 된다. 창업자 별세의 충격을 딛고 재정비를 마친 한국화약그룹 역시 그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새로 7번째 구단이 창단되더라도 연고지를 삼을 만한 지역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전라북도나 경상남도 정도가 거론되기는 헀지만 일단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여전히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 선에 걸려 있던 상황에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모두 온전히 프로야구팀의 연고지 역할을 하기엔 인구도 부족하고 야구 인프라도 충분하지 못했다. 또한 두 지역 모두 연고지로 활용하고 있는 해태와 롯데가 특히 극심한 선수 부족을 호소하고 있던 사정 역시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1984년을 끝으로 OB 베어스가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면 무주공산으로 남게 될 충청권이 당연히도 가장 유력한 '제7 구단'의 연고지로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6개 구단의 구단주들로 이루어진 KBO 이사회에서는 제7 구단 창설을 희망하는 신규 참가기업이 최소한 30억 원 이상의 가입금을 KBO에 납부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그 30억 원의 용도는 KBO가 입주할 야구회관을 마련하고 공동으로 관리할 기금을 조성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1985년 1월 KBO 이사회에서 희망 기업의 창단신청서를 접수한 뒤 그중 한국화약그룹의 창단신청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한국화약은 KBO가 애초에 제시했던 '30억 원의 가입비 납부' 조건에 대해 '직접 30억원 상당의 야구회관을 지어서 기부하겠다'는 수정안을 내놓았고, 결국 그렇게 지어진 것이 지금 KBO와 야구협회등이 입주해 있는 서울 강남 도곡동의 야구회관이다. 사실 한국화약 쪽에서는 30억 원이라는 현금 납부 요구가 부담스러워 보유하고 있던 토지와 계열 건설사를 통한 현물 납부 방식을 택한 것이었지만, 정작 야구회관이 완공되고 입주가 시작된 1988년 5월 무렵에는 땅값이 크게 오르면서 30억 원의 갑절이 넘는 가입비를 낸 셈이 되고 말았다. 제7 구단의 창단이 확정되고 한국화약그룹은 세 팀의 이름을 짓는 공모를 시작했고, 응모자들 중 약 10퍼센트에 달하는 이름 '이글스'를 채택했다. 초대 감독으로 1985년 배성서 감독이 사령탑에 올랐다. 배성서 감독은 영남대, 동국대 등 대학팀 지도자로 활약하며 여러 차례 대학야구무대 우승을 경험했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코칭스태프로서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지도자였다. 그는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해 강한 체력과 철저한 기본기를 만드는 것을 중요시하는 감독이었고, 그래서 신생팀이나 약체팀을 빠른 시간 내에 강팀의 반열에 올리는 것을 특기로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구단 운영을 맡을 그룹 계열사로 확정된 빙그레 제과가 결정됐고 팀이름은 '빙그레 이글스'로 확정됐다. 빙그레 이글스는 그런 육성과 조련의 능력을 높이 샀을 뿐만 아니라, 보다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새 팀의 단단한 기틀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며 매우 파격적인 조건으로 초대 감독을 예우했다. 3년 계약으로 계약금 3천만원, 연봉 3천만원, 총 1억 2천만원의 계약 규모로 국내 최고 수준이었을 뿐 아니라, 국내 최초 다년 계약이라는 점에서도 파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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